- 인터넷에서는, 아무도 당신이 회화라는 것을 모릅니다. ㅡ 황재민
-
인터넷에서는, 아무도 당신이 회화라는 것을 모릅니다.
황재민
1.
인터넷 회화, 혹은 디지털 회화라는 이야기가 가능할까? 회화엔 네트워크 연결을 가능케 하는 플러그도 없고 와이파이를 연결할 수 있는 무선 접속 장치도 없다. 온전히 이진수로 표현될 수 없으며 데이터를 직접 받아들일 수도 없는 특정 개체가 어떻게 디지털화(digitalized)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는 방향이 여러모로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 혹시 ‘포스트-인터넷(post-internet) 회화’라는 이야기는 가능할 수 있을까요? 앗 헉 그것은…
“인터넷에서는, 아무도 당신이 개라는 것을 모릅니다. (On the Internet, nobody knows you're a dog.)” 1993년, 만화가 피터 스타이너(Peter Steiner)가 『더 뉴요커(The New Yorker)』를 통해 발행한 카툰 한 장은 인터넷이 지닌 어떤 속성을 여러모로 압축하여 보여준다. 컴퓨터 앞에 앉은 검은 강아지가 아래에 있는 점박이 강아지를 향해, 조금 들뜬 표정으로, “인터넷에서는, 아무도 당신이 개라는 것을 모른다”며 충고하는 이 카툰에서는, 인터넷이 근본적으로 익명의 공간, 그러므로 그야말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사실이 표현된다. 인터넷은 개의 신체와 인간의 신체가 분별되지 않는 비물질적 공간이며, 개의 의견과 인간의 의견이 같은 것으로 취급될 수 있는 평등한 공간이다. 서로 멀리 떨어진 노드를 연결하는 새로운 네트워크로서 인터넷은 상상도 못한 변환을 세상에 주며, 이 광활한 인터넷 세계는 버튼 하나, 클릭 한 번, 네트워크를 통제할 수 있는 작은 움직임 하나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을 바꾸면, 이건 연결이 불가능한 특정 상황이 아니라면 이 모든 놀라운 변화를 체험할 수 없다는 뜻이 되는 것 아닐까? 실제로 이 사실은 인터넷의 중대한 약점 중 하나였으며, 그렇기에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약한 고리를 보완하기 위해 엄청난 인프라가 투자된다. 단말기, 네트워크, 노드에 이르기까지, 물적 토대가 계속해서 갱신되고 보완된 이후 인터넷이 보여주는 전과 다른 어떤 세계는 결과적으로 보편화되었다. ‘포스트-인터넷(Post Internet)’, 그러니까 ‘인터넷 이후’의 세상에 대해 말하는 몇 가지 의견은 이처럼 보편화된 인터넷이 우리의 감각과 무의식으로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는 통찰을 담아낸다. 인터넷은 더 이상 새로운(novelty) 것이 아니라 평범한(banality) 것이 되었으며,1 연결은 이제 24시간 가능한 무의식적인 것이 되었다. 일상 속으로 깊게 보편화된 인터넷의 감각은 네트워크에 직접 연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개인이 ‘인터넷적인 것’을 충분히 환기하고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Climate)을 만들어낸다. 더 이상 연결은 필요 없으며 여기서는 당신이 네트워크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이다.
과거, 작가이자 이론가인 페터 바이벨(Peter Weibel)은 컴퓨터를 포함하는 새로운 기술 매체가 회화, 그리고 조각에 이르는 역사적 매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 전망한 적 있다. 뉴미디어 이론가의 적극적 공상에 가깝게 들렸던 이 이야기는, 그러나, ‘인터넷적인 것’이 네트워크에 직접 연결되지 않은 오프라인 시공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인터넷 이후’의 의견과 엮이며 다시 한번 강조된다. 인터넷이 잠재된 당신-네트워크가 디지털화될 수 없는 종류의 역사적 예술 범주, 그러니까 회화나 조각 등을 만들어낼 때 인터넷의 영향은 해당 개체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포스트-인터넷 회화’, 혹은 ‘포스트 디지털 회화’라는 이야기를 위한 기반은 이렇게 만들어진다.2
‘포스트-인터넷’이라는 수사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점은 2006년 즈음으로 알려져 있다. 작가이자 큐레이터인 마리사 올슨(Marisa Olson)은 모든 종류의 예술 실천에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개입되기 시작한 상황을 ‘포스트-인터넷’이라고 호명했다.3 당시 이것은 분명 새로이 등장한 감각적 상황을 묘사한 구체적 수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등장한지도 어느새 약 15년이 지났고, 그렇기에 이 말 역시 어느 정도는 낡거나 혹은 성숙하고 풍부해져, 이제는 여기에 무엇이 어떻게 쌓여 있는지 대략적으로 들추어보는 일이 가능해진 시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스트-인터넷 회화’라는 특정 범주가 최소한 장르로라도 기능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그것은 확실치 않은 것 같다. 물론 ‘포스트-인터넷 예술(post-internet art)’이라는 말은 가능하다. 어떤 작가들은 이 범주, 혹은 경향, 혹은 그게 어떤 것이든 거기에 참여하며 자신의 의견을 명백하게 밝히고, 그건 지금도 동시대 미디어 환경에 대한 중요한 진술로 기능한다. 그러나 '포스트-인터넷 회화'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같은 단언이 가능할까? 아니라면 왜일까?
2.
다양한 이야기가 가능하겠으나, 여기서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는 진술을 옮겨 살펴보기로 한다. 작가 아티 비어칸트(Artie Vierkant)는 2010년, ‘포스트-인터넷’이라는 수사가 점차 구체화되던 초기,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 글을 공개했다. 이 글을 통해 작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확하게 한다. 인터넷은 세상을 바꾸었으며 ‘인터넷 이후’의 환경은 그 변화를 공식화하거나 보편화했다. 무의식 차원으로 개입한 인터넷은 유한한 튜링 머신인 컴퓨터의 계산 가능한 영역을 확대했으며, 이 과정에서 세계 전체가 어쩌면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새로이 재편된다. 이와 같은 생각을 따라, 비어칸트는 인터넷 이미지를 다양한 형태로 분산, 또는 변형시키는 작업의 방법론을 합리화한다. 나아가 이 변형은 지난 세기의 전유(appropriation)라는 방법과는 다른 종류의 것으로 설명되는데, 여기서 변형을 위해 선택되는 물체는 근간을 데이터의 차원에, 나아가 인터넷의 차원에 두고 있으며, 그러므로 분산, 또는 변형 과정에서 원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원본 없는 세상의 논리를 따라, 이를테면 ‘무빙이미지(moving image)’는 조각으로 전유될 수 있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원래 ‘무빙이미지’였다는 사실을 돌이킬 필요도 없다. ‘무빙이미지’에서 조각으로, 디지털화된 예술에서 디지털화될 수 없는 예술로, 서로 다른 두 매체가 ‘인터넷적인 것’을 무의식에 담은 개인을 경유해 이동할 때 디지털 네트워크 속에서 이진수로 저장된 ‘인터넷적인 것’의 존재론은 미술관에 전시될 수 있는 실제 물질로 옮겨질 수 있다. 이 의견은 일견, 역사적, 또는 ‘전통적’ 매체로서, ‘인터넷 이후’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 물질-몸을 지닌 회화를 새로운 물질의 해석 속으로 재위치시킬 수 있는 근거로도 읽힐 수 있을 듯 보인다. 그러나 비어칸트의 작업은 대중매체(mass media) 속에 용해된 스펙타클로 멸시되던 얄팍한 이미지를 구출할 수 있는 미학적 방법으로 이용될 따름으로, 그러니까 비어칸트의 작업과 글은 ‘인터넷적인 것’을 실제 전시장으로 빼내오기 위한 분명한 알리바이를 설계하지만, 그것은 이미지라는 범주를 위한 것이지 회화를 위한 것이 아니며, 사실 이 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실존한다.4
그런 한편, ‘인터넷 이후’의 감각이라는 새로운 미학적 탈출구를 알리바이 삼아, 역사적 매체인 회화의 쓸모를 주시하려는 흐름 역시 존재하는 것 같다. 디지털 예술을 위한 플랫폼 ‘리좀(Rhizome)’에 실린 글에서, 평론가 알렉스 베이컨(Alex Bacon)은 이제는 익숙한, 평범한 일상의 조건 중 하나가 된 스크린을 회화의 일부로, 나아가 ‘지지체(support)’로 삼는 사례를 나열한다. 로버트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와 같은 과거 거장이 모더니즘 미술의 내부에서 회화가 가졌던 막대한 중력을 교란하고자 그것의 내부 전통에서 탈각된 물건을 자유로이 사용했듯, 현재 어떤 회화 작가들은 모니터 스크린이나 스마트폰 디바이스 등을 레디메이드 삼아 회화를 위해 쓰며 ‘인터넷 이후’의 환경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한다. 이 과정에서 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문제와 계속해서 부딪혀야만 했던 회화는 자신의 내부로 스크린이라는 대상을 편입시키며, 스크린을 통해 중계될 수 있는 다양하고, 또 새로운 문제들에 참여할 수 있게끔 갱신된다.5
좀 더 가까운 사례도 있다. ‘인터넷 이후’를 환기하는 감각이든, 혹은 존재론이든, 이와 같은 영역을 다루려는 많은 실천이 한국에서도 있어 왔다. 그 중 몇몇 역시 회화라는 틀을 경유해 이 문제를 다루고자 했는데, 이를테면 정희민은 스케치업 등을 이용해 조성한 이미지를 유화 물감으로 그려내고, 겔 미디엄을 활용해 캔버스 위에 투명한 얼룩처럼 보이는 물질의 레이어를 한겹 더하며 가상적 감각에 가까운 그 무엇을 시각화했다. 이제 거의 그만의 시그니처처럼 보이는 이 방법은, 촉각성이 특히 유실된 ‘인터넷 이후’의 환경에서 개인으로 살고 예술가로 창조하며 겪는 불가해한 상실, 즉물적 현실에 대한 상실을 강조하기 위한 회화적 제스처로 읽히곤 했다.6 이 상실은 실상 아티 비어칸트와 같은 작가들이 새롭게 발생한 해방이라 여긴 감각의 양면처럼 보이는데, 한 쪽에서 기술이 이미 세상을 바꾸었으며 드디어 인간의 무의식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기쁨을 표할 때, 다른 쪽에서는 우리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 기술이 우리에게 선사한 새로운 불가능성을 발견하곤 눈물 흘린다.
미학자이자 평론가인 곽영빈은 정희민의 작업을 다룬 글, 「디지털 인터페이스와 모눈종이 사이: 정희민의 형상과 배경」(2020)에서, 작가가 실체를 상실한 디지털 이미지를 묘사함으로써 상실감의 멜랑콜리를 환기하는 한편,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이분법에 빠지는 대신 배경과 형상이라는 위계적 구분을 유예시키며 세계의 변화한 조건을 성찰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는다. 정희민이 특정 현상에 대한 즉각적 감각을 단순 시각화하는 것에 머무는 대신 세계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개인전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If We Ever Meet Again》(2020)에서 활용한 모눈종이의 격자 구조에서 드러난다. 이 격자 구조는 디지털 이미지의 픽셀 구조를 표시하는 동시에 모더니즘의 상징물인 그리드(grid)를 동시에 환기하는데, 말하자면 작가의 성찰은 ‘인터넷 이후’의 환경을 탐구하며 이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탈락된 매체성, ‘회화적인 것’을 굳이 함께 탐구하는 과정에서 파생된다.7
여기서 잠시 억측하자면, 그렇다면 ‘인터넷 이후’의 분열적 환경에서 회화의 쓸모는 상실된 현대성을 가장 강력하게, 동시에 가장 불필요하게 환기함으로써 다시 성립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호한 상황은 변화한 미디어 환경이 보다 분명하게 지각되기 이전부터 회화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회화는 모더니즘과 연루될수록 위험해지므로 그로부터 반드시 벗어나야 옳다. (그것은 물화된 상품이며 시장의 토큰이다. 혹은 그린버그가 개념화한 ‘평면성’의 상징이며 억압적 현대성 전체를 상징한다.) 하지만 현대성이 유실된 현재, 회화는 낡은 현대성을 무의식적으로 자동 기술하며 첨단의 기술과 연루될 수 있다. (고루한 모더니즘의 상징물로서 회화라는 절대적 과거가 도입되는 순간 시간의 위상이 재편된다.) 이때 회화는 아무 의미를 담지 못하는 것이 옳은, 빈 칸에 가까운, 모호한 형식으로 귀결되며, 반드시 회화여야만 하는 필연성을 손실하며 그것은 옳은 일이다(라고 간주되는 듯하다). 어쩌면 인터넷 이후의 환경이 촉발한 매체적 혼란과 상실을 회화는 전부터 미리 앓고 있었다. ‘포스트-인터넷 회화’라는 언술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화가 오로지 빈 칸이라면, 여전히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것을 하는가?”라는 힘든 질문 없이 피상적으로 매체를 다루는 위악이 여전히 정말로 유용한가?
3.
머리가 아파 오는 힘든 질문에 섣부르게 대답하기에 앞서, 필연성과 자율성을 갖출수록 유독해지기에 특정성을 주장하기 어려운 회화가 갖는 모호한 매체성을 긍정하기 위한 사례들에 초점을 잠시 맞춰보도록 한다. 이를테면 데이빗 조슬릿(David Joselit)은, 2009년에 쓰인 그의 글 「자기 옆의 회화 (Painting Beside Itself)」에서, 동시대 미술의 영역에서 펼쳐지는 회화의 생존 전략을 ‘타동적(transitivity)’이라는 말로 검토했다. 갱신된 미술의 영역에서 회화가 갖는 치명적 약점 중, 그 자체로 완결된 것처럼 보이는 단일한 물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조슬릿은 회화는 사실 단일한 물체가 아니라, 언제나 모종의 네트워크에 속해 있었으며 이를 의식한 실천이 있었다고 부연한다. 이런 종류의 작업들은 회화를 단일한 물체로 취급하는 대신 퍼포먼스, 설치 등 회화 바깥의 매체를 회화와 연결 지었으며, 그것으로 회화의 내부와 외부를 함께 엮으며 모종의 네트워크를 시각화, 혹은 형성했다. 어떤 물질의 특정한 행동을 표현한다는 의미의 ‘타동사의(transitive)’라는 단어로부터 쓰임을 따와, 조슬릿은 이를 ‘타동적’ 회화라고 정의하는데, 여기서 회화는 여러 매체와 상황이 얽혀 만들어진 모종의 네트워크를 위한 하나의 통로(passage)처럼 사용된다.8 ‘타동적’ 회화가 포함된 모종의 네트워크 상황 속에서 회화의 권력은 효과적으로 분산되며, 동시에 이 네트워크는 회화를 중력 삼아 방만하게 펼쳐지지 않고 무게 중심을 잡을 수 있다.
'타동적' 회화는 미학화된 사물이 무조건 비가시적이고 실질적인 네트워크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동시대 미술의 진단을 바탕으로 한다. 모든 형태의 사물은 전시되거나, 소장되거나, 중단되거나 옮겨진다. 이 실질적인 네트워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물은 없으며, ‘인터넷 이후’의 환경이라는 변환은 이 네트워크를 단순히 물리적인 것으로 멈춰두지 않는다. 이제 네트워크는 느린 지리적 속도에서 빠른 디지털 환경의 속도에 이르기까지, 멈출 수 없는 다양한 속도 속에서 순환될 수밖에 없으며, 이 네트워크에 입장한다면 회화의 몸체 역시 단일하지 않은 것으로 분산되고 파편화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타동적’ 회화라는 진단은 회화를 물화라는 오래된 비판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고 나아가 긍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 글에서, 네트워크의 용법은 다소 모호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미술 제도와 관계 맺는 ‘사회적인 것(social)’의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술계’ 내부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또한 다종화, 다각화된 미술 문법이 합쳐지고 어울리는 작업 내부의 네트워크나 광대한 전지구적 인터넷 네트워크를 지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조슬릿은 네트워크의 의미를 특정하지 않고 다소 임의적으로 내버려두는데, 이처럼 확장된 네트워크의 서술은 회화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매체론과 ‘인터넷 이후’의 환경에 대한 논의가 겹쳐지는 단초가 되는 듯 보인다.
그 후 몇 년 뒤 쓰인 또 다른 글 「(시간을) 표지하기, 기보하기, 저장하기, 사변하기(Marking, Scoring, Storing, and Speculating (On Time)」(2016)에서, 조슬릿은 보다 분명한 어조로 ‘인터넷 이후’의 환경이 촉발한 모종의 상실이 오히려 회화의 매체성을 새로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쓴다. 디지털화되고 세계화된 오늘의 환경에서, 회화를 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예술 소비는 가속화된다; 모든 예술 작품은 실은 내재적으로 절대 해설될 수 없는 영원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제 그것은 핸드폰으로 촬영된 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로, 블로그로, 메신저로 흘러 들어가 영원히 재생되지 않을 거대한 정보의 저수지로 수렴되고 만다. 이처럼 산산이 분산되어버리는 회화는 이제 그 어떤 힘도 지닐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조슬릿은 초가속적으로 회화를 분산시키고 거의 무한하게 시간을 저장하는 디지털 이미지가 스펙타클로 전이되는 대신, 회화를 위한 일종의 ‘스코어(Score)’로 기능할 수 있다는 사변을 전개한다. 디지털 이미지는 마치 악곡을 위한, 혹은 퍼포먼스를 위한 '스코어'처럼 회화의 영원한 시간성을 보관하며, 여기서 사진, 곧 디지털 이미지를 통해 매개된 회화는 특유의 즉물성을 잃은 피상적 매체가 아닌, 무한한 회화의 발생 가능성을 그 자신 안에 잠재하고 있는 형식이 된다. 이것은 여전히 분산이지만, 흩어버리고 빻고 사라지게끔 촉진하는 분산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잠재된 감각을 매개하고 새로 인식하게끔 돕는 악보적 분산이다. 분산된 디지털 이미지의 순환을 곧 회화에 내재된 시간과 경험을 위한 일종의 기보법으로 다시 생각하며, 그는 모종의 상실을 다시 한번 긍정하고자 한다. 오늘날 세계화되고 디지털화되는 세상은 가장자리와 중심의 중력을 재배치한다. 이제 중심은 없으며, 회화 역시 이 재배치 과정을 공유한다.9
이와 같은 사변을 통하여, 조슬릿은 ‘인터넷 이후’의 파편적 환경이 회화의 기초적인 조건을 상실시키고 불가하게 만들었을 수 있지만, 어쩌면 동시에 그것을 성공적으로 갱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인터넷 이후’의 환경에서 작동할 수 있는 회화를 위한 담론의 예로 흥미롭지만, 한편으로 시간이라는 범주를 회화와 연결시키며, 이 안에 현상학적이며 나아가 본질적인 무엇이 반드시 잠재한다는 전제에 기반하기에 부담스럽다. ‘인터넷 이후’의 환경이 촉발한 모종의 변화가 회화에게 시간을 다시 갖추게끔 조장한다는 말은 아름답다. 하지만 이제 세상에 어떤 즉물적 현존이 가능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상황에서 회화가 그것을 갖출 수 있으리라는 말은, 누구에게도 독해되기 어려운 가상의 암호를 회화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으로 연결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독일의 미술사가이자 평론가인 이자벨 그로(Isabelle Graw) 역시, 이제 회화는 단순히 단일 개체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네트워크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을 공유한다. 저서 『회화에 대한 사랑(The Love of Painting)』(2019)에 실린 한 챕터를 통해, 그로는 ‘네트워크 회화(network painting)’가 폐기되었던 회화의 매체성을 적법하게 만드는 캐치프레이즈처럼 사용된다는 사실을 짚는다. 그의 글에서, ‘네트워크 회화’가 가능해지는 배경은 두 가지다. 첫째는 1990년대 이후,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보편화되고 메타 미디엄으로 부상한 컴퓨터의 영향이 미술사 내부를 침범하기 시작했다는 점, 그로 인해 어떤 미적 매체도, 심지어 회화조차, 그 내부적 논리만으로는 문제적일 수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사회 과학의 영향인데, 이를테면 브루노 라튀르(Bruno Latour)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과 같은, 사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론틀이 (놀랍지 않게도) 예술계에서 큰 환영을 받은 결과 “네트워크”라는 단어의 쓰임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다. 글에서 그로는 ‘네트워크 회화’를 다소 의심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더니즘의 순수성으로부터 회화를 빼낼 수 있는 용례로 긍정하면서, 나아가 회화가 ‘인터넷 이후’의 새로운 사회적 세계를 포함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짚는다. 이를테면 이것은 SNS 같은 것이 회화의 일부로 안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10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작가 에이브리 싱어(Avery Singer)의 작품을 분석한다. 에이브리 싱어는 ‘예술계’ 흔히 안에서 일어날 법한 상황을 상상한 뒤, 그것을 스케치업 3D 모델로 연극적으로 묘사, 이후 에어브러쉬를 사용해 환영성을 띄는 회화로 제작한 연작을 통해 유명세를 얻었다. 작가는 뉴욕과 베를린을 순환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시장에서 주목받고자 애쓰는 장면, 예술계 바깥의 논리로 보면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지나지 않는 퍼포먼스 연출의 고단함, 그리고 관례화된 스튜디오 방문의 공허한 풍경 등, ‘예술계’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 애매한 사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포착한다. 그로는 이 연작에 대해 설명하면서 작가가 SNS를 통해 작업 과정이나 스케치 등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행위는 작가의 SNS 포스팅에 ‘좋아요’ 따위로 반응하는 불특정 디지털 관객들에게 이 예술의 사회적 관계에 포함된 듯한 동질감을 주며, 이것은 작가가 디지털화되고 세계화된, 중심과 가장자리를 구분할 수 없는 세상을 향해 회화를 분산하고 있다는 제스처로 기능한다. 싱어는 이 연작을 주로 흑백의 색채로 표현했는데, 절대로 디지털 스크린 속의 그 색과 똑같이 출력될 수 없는 다른 색들과는 달리, 흑백은 스크린과 실제의 격차가 가장 적은 색이다. 그로는 이 흑백의 사용이 디지털 디바이스와 물리적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회화가 더 적절히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한 근거라고 쓴다.11
삶을 매개로 가상과 실제를 융합하는 SNS의 세계는 ‘인터넷 이후’의 환경을 대표할 수 있는 생생한 사례로 꼽힌다. 그런 만큼 회화 역시 이 세계에 포함되어 기능할 수 있다면, 그 역시 갱신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위의 글에서, 그로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짚는다. 그것은 오늘날의 경제와 얼마간의 관련이 있는데, SNS를 통해 구축된 사회적 관계가 이제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단위화된다는 점, 이를 통해 삶을 결국 가치 있는 경제적 추출물로 환원시키고 만다는 점이다. ‘생명권력(bio-power)’의 논의를 따라, 그로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전시하는 행위가 자발적으로 경제적 추출의 대상이 되는 행위와 동일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12 게다가 어쩌면 여기에 또 하나, 맥락이 다소 다른 비판적 의견을 더할 수도 있을 듯하다. 이를테면 소셜 미디어의 디지털 세계와 네트워크로 접합된 회화는, 자연스럽게 “플랫폼 자본주의(Platform Capitalism)”의 비가시적 착취에 적극 영합하는 예가 될 지도 모른다는 의견 말이다. 표정을 살짝 진지하게 바꾸어 계속해 말해보자면, 오늘 날 거대 테크 기업은 단순한 정보의 소유자를 넘어 사회 기반 시설의 소유자로 변모하고 있다, 자산 대신 데이터를 사유화한 이른바 ‘린 플랫폼(lean platform)’은 초-외주화 모델을 통해 이익을 얻고 전세계 비공식 시장의 노동자들이 초단기 일자리를 얻기 위해 스마트폰을 구입하기를 강제한다, 이 수익은 다시 거대 테크 기업으로 환원되며, 소셜 미디어의 네트워크를 예술이 자신의 기반으로 삼는 행위가 이 착취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대충 이런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13 이것은 단지 오래된 비판을 반복하는 함정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SNS가 ‘네트워크 회화’를 적극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단지 힘차고 긍정적인 논지로만 남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네트워크 회화’는 어떤 이유에선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회화의 전략을 긍정하기에 좋은 담론적 렌즈처럼 보인다. 그러나 즉물적 경험의 신화화냐, 혹은 ‘인터넷 이후’의 세계를 차츰 정복한 플랫폼과의 착취적 밀월이냐, 갱신된 회화가 기댈 수 있는 담론의 지평은 나름의 어려움을 각기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 조슬릿과 그로의 의견 모두 (말하자면) ‘회화적인 것’을 퍼포먼스로, 설치로, SNS로, 외부로 확장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조금은 불만스럽다. 혹시 ‘회화적인 것’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가능한, 그런 종류의 확장은 없을까?
질문에 대한 가설적 대답으로, 호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이자 이론가 마크 티트마쉬(Mark Titmarsh)의 소수 의견을 더해 둔다. 오늘의 세계를 점유한 모종의 조건, 디지털화와 세계화에 더해, 그는 한 가지 변환을 덧붙인다. 그것은 생태적 전환(ecological turn)이다. 생태적 사고 아래, 어디에도 독립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유기체적으로(organic) 연결된다. 유기체적인 사고 아래 세계를 본다면 거기에는 명확히 호명 가능한 개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무, 뿌리, 땅, 미생물, 습기와 기타 등등, 개체는 역동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으로 세계를 이룬다. 마크 티트마쉬는 생태학적 담론을 미적 실천에 대입해, 회화 역시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개체이며 단일한 개체로 존재할지라도 여전히 네트워크에 속해 있다는 생각을 가능케 한다.14
생태적 모델을 경유하면, 이제 더는 어디에도 단단한 것은 없다. 지구의 미래 자체가 불투명한데 그 어떤 것이 투명하거나 단단할 수 있겠는가? 기존에 단단함을 지닌다고 생각되었던 영역은 천천히 해체되며, 그 ‘단단한’ 영역의 내부에 미리 설정되어 있었던 정보를 허문다. 이와 같은 진단은 내부를 향해 더 많은 네트워크를 찾고 발견할 수 있다는 당위로 이어지며,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자면 성찰적인 네트워크가 가능해진다.
그 스스로 확장된 회화 매체를 탐구하는 작가로서, 티트마쉬의 논지는 ‘회화에서 확장이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 것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그는 회화가 자문(self-questioning)으로 깊어지며 확장되는 상황을 거론하는데, 이 자문의 목록은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다 - ‘무엇이 회화를 위하여 적절한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물감은 제거될 수 있는가?’, ‘조각이 회화에 더해질 수 있을까?’, ‘무엇이 더해질 수 있고 무엇이 제거될 수 있는가?’와 같은 실용적인 질문에 이르기까지,15 회화가 갖는 미술사적 유산은 여기서 탈출해야 할 억압이 아니라 다양한 자문을 가능하게 만드는 풍부한 데이터베이스로 치환된다. 티트마쉬는 확장 자체를 생태적인 모델, 개체가 개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속해 있는 세계와 항시 역동적으로 상호교환하는 모델로 재정의하는데, 이것은 ‘네트워크 회화’가 반드시 모종의 외부를 경유하지 않고도 작동할 수 있는 알리바이로 활용될 수 있다.
4.
나가며, 전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차라리 나쁘겠어요》는 “차라리 나쁘”기를 택한다. 전시는 비물질화된 세계의 상실을 다루는 회화에게 짝사랑이라는 정념을 부여한다. 회화는 짝사랑의 달인이며 그러므로 상실의 달인이다. 그러나 사랑이 때로 큰 대가를 요구하는 것에 비해, 짝사랑은 고통스럽지만 안전한 선택이다. 짝사랑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역설적으로 “사랑과 연애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사랑할 수 없기에 이것은 나쁘지만, 나쁜 상태를 유지하며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긍정적이다. 회화 역시 마찬가지로, “차라리 나쁘기”를 의도적으로 선택할 때 가능해지는 절박한 지속이기에 의미 있으며 나아가 가능해지는 형식이다.16 그러므로 “‘포스트-인터넷 회화’는 가능할까?”라고 묻기보다는, “회화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라고 묻는 편이 여전히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 환경이 바뀌고 상황이 변화해도 회화는 자유로운 짝사랑의 달인으로 기둥 뒤에 숨어 세상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이후’의 상황을 감각했던 예술가들에겐 어느 정도 선구자적인 성격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인터넷에 익숙했으며 그러므로 개인이 온전히 감각할 수 없는 이미지의 광대한 저수지로부터 의미 있는 ‘글리치(glitch)’를 찾아내는 데에도 익숙했다. 그러나 반복해 말하듯, 이 새로운 상황이 발견된 지 꽤 시간이 흘렀고 그렇기에 이 상황의 질서 역시 조정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인터넷이 새로운 것에서 평범한 것이 되었다는 자각 역시 점차 평범한 것이 되고 말았으며, 나아가 이미지의 저수지 역시 어쩌면 빠른 시간 안에 분류되고 정렬될지 모른다. 그리고 이 정렬은, 아마도 인간의 힘으로 인한 결과가 아닐 것이다. 또한 단시간 내 ‘인터넷적인 것’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 넘은 계산에 의하여, 인간에게 가장 친절한 형태로 제공될지 모르며, 정보는 곧 실제 가치를 담지하기 시작할지 모른다. 정보가 곧 가치가 된 상황에서 ‘글리치’를 발생시키는 것은, 하나의 사회 운동을 통해서야 겨우 조직될 수 있을 묘기가 될 텐데, 이제 자유는 없고 무법지대는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예술에겐 불행일지 몰라도, 이것은 분명하게 옳은 방향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어떤 것들은 옳고 맞고 좋고 아름답기를 위할 때가 아니라, 그러느니 나쁘기를 선택할 때 드러날 것이다. 회화는 마치 어떤 방향도 바라보지 않는 듯한 혼잣말, “차라리 나쁘”겠다는 혼잣말 속에서 지속된다. ”그런데, 나쁘기를 선택하는 회화는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17
1ㅤMarisa Olson, 「Postinternet: Art After the Internet」, 『Foam Magazine 29』, Winter 2011, 61p.
2ㅤPeter Weibel, “The Post-Media Condition”, medialabmadrid.org, 2006. 원문 소실, 다음의 링크를 통해 확인, 2021년 6월 28일 접속. 가서 보기.
3ㅤRégine Debatty, “Interview with Marisa Olson”, we-make-money-not-art.com, 2008년 3월 28일, 2021년 6월 28일 접속. 가서 보기. 해당 인터뷰를 통해 마리사 올슨은 2006년, 『타임아웃(Timeout)』에서의 인터뷰를 통해 ‘포스트-인터넷’이라는 수사를 처음 거론했다고 언급하지만, 원문이 소실되어 찾아볼 수 없다. 같은 말이 2008년 발표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4ㅤArtie Vierkant, “The Image Object Post-Internet”, jstchillin.org, 2010년 12월 14일, 2021년 6월 28일 접속. 가서 보기.
5ㅤAlex Bacon, “Surface, Image, Reception: Painting in a Digital Age”, RHIZOME, 2016년 3월 24일, 2021년 6월 28일 접속. 가서 보기.
6ㅤ김홍기, “거미 여인”, 2021년 7월 28일 접속. 가서 보기.
7ㅤ곽영빈, 「디지털 인터페이스와 모눈종이 사이: 정희민의 형상과 배경」,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입주 작가 비평 모음집』, 국립현대미술관, 2020, 83-87p.
8ㅤDavid Joselit, 「Painting Beside Itself」, 『October 130』, Fall 2009, 127-129p.
9ㅤDavid Joselit, 「Marking, Scoring, Storing, and Speculating (On Time)」, 『Painting Beyond Itself: The Medium in the Post-Medium Condition』, Isabelle Graw, Ewa Lajer-Burcharth, eds., Sternberg Press, 2016, 11-20p.
10ㅤIsabelle Graw, 「Frozen References to Life in Avery Singer's Paintings」, 『The Love of Painting』, Sternberg Press, 2019, 264-266p.
11ㅤ위의 책, 266-269p.
12ㅤ위의 책, 266p.
13ㅤ닉 서르닉, 『플랫폼 자본주의』, 심성보 역, 킹콩북, 2020, 43-82p.
14ㅤMark Titmarsh, 『Expanded Painting: Ontological Aesthetics and the Essence of Colour』, 「The Presence of Paint」, Bloomsbury Publishing(UK), 2019, 2-5p.
15ㅤ위의 책, 6-9p.
16ㅤ김얼터, “전시를 여는 글”, 2021년 6월 28일 접속. 가서 보기.
17ㅤ김얼터, 편집 중 기록된 구글 문서 메모로부터 발췌. 2021년 7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