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피스오브
exhibition
차라리 나쁘겠어요
invitation

전시를 여는 글

김얼터


사랑은 우리의 세계에 신비를 부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짝사랑의 신비로, 짝사랑은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번호로 메시지를 보내는 일과 같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발송하는 메시지, 한 글자 한 글자에 순도 99%의 사랑을 욱여넣는. 러시아의 한 심리학자는 이 신비에 자이가르니크 효과(Zeigarnik Effect)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완성되지 못했거나 마치지 못한 일에 더 마음을 쓰게 되는 이 현상은 우리의 구석 구석에, 그러므로 우리 라이프스타일의 전반적인 풍경에 포진해 있다. 자이가르니크의 핵심은 자꾸만 욕망하게 만들어서 사건의 종료, 사물의 소유, 사랑의 성취라는 목적을 실현하는 불굴의 의지가 아니다. 짝사랑의 신비는 이 사랑이 이루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데에서 온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냥 사랑과 연애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모든 사랑 중에서도 짝사랑에 특히 더 능하다.


구글 이미지 검색의 미리보기용 이미지를 생각해 본다. 미리보기용 이미지들은 실재를 부풀리며 작동하는 상품 광고 이미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 간다. 이들은 건강한 이미지의 병약한 대역으로, 아픈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픈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을 조합한 아픈 척하는 이미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디테일이 뭉개져서 두드러기가 난 것 같은 이미지, 좋지 않은 인터넷 연결 상태 때문에 로딩되다 말아 블러(blur) 상태에 멈춰 버린 이미지, 8k 시대에는 부덕함의 상징이 되어 버린 계단식 앨리어스를 날것으로 선사하는 이미지, gif 확장자이면서도 주어진 용량에만 충실해 첫 프레임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 혹은 포토샵에서, 실수로 잡아당겨져 자기 위치를 이탈해 버린 레이어, 어쩌다 보니 눌러 버린 색 반전 단축키 때문에 마음대로 호러가 되어 버린 컬러, 마술봉으로 선택했지만 전혀 마술 같지 않고 비극적이기만 한 누끼. 캔버스에서는, 떨어트렸거나 다른 것을 만들기 위해 바닥에 깔았던 걸까 싶은 의혹을 불러오는 물질적 지지체들, 보관을 잘못해 평평해야 할 것이 울어 버렸거나, 무엇이든 칠해져 있어야 하는 부분의 색이 벗겨져 버렸거나, 물감도 아닌 것이 칠해져 버린 것들. 이들은 바로잡아지거나 치료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기 쉽다.


그러나 그냥 사랑보다 짝사랑에 더 능한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어떤 이미지들은 자기 자신이 원래부터 이렇게 태어나 버렸다는 비밀을 알고 있다. 전시 《차라리 나쁘겠어요》에 참여하는 김다정, 방소윤, 이운, 한지원의 회화는 포토샵이었다면 되돌리기를, 웹브라우저였다면 뒤로 가기나 새로 고침을 요구했을 이미지를 선보인다. 되돌리기와 뒤로 가기, 새로 고침 같은 기능은 어떤 미래와 오류가 존재했었다는 사실 자체를 지우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회화의 일은 미래와 오류를 수정하거나 보완하면서 그것과 함께, 혹은 그것 자체가 되며 방향 없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완전해지기보다 나쁜 상태에서의 직진을 선택하는 것은 그냥 사랑보다 짝사랑을 선택하는 일이며, 이 선택은 회화의 일과 닮아 있다. 바로 여기서, 무엇도 지울 수 없고 다만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데에서부터, 짝사랑의 신비가 시작된다.



introduction
  1. 김다정 김다정(b.1995)은 스포츠 경기, 특히 선을 경계로 득점이 이루어지는 게임과 그림을 그리는 과정 사이의 유사한 지점을 생각한다. 경기에서의 시행착오를 그림의 요소로 이용한다. 청각, 촉각, 무드를 형상화한 형태처럼 거의 효과에 가까워진 이미지를 찾는다. 이는 방향을 지시하는 도형과 속도감을 나타내는 물감의 흔적 등으로 나타난다. 광택이 다른 물감이 겹쳐져 있다. 이것은 얇은 판, 흘러내리는 덩어리, 붓질 그 자체로 등장하고 서로를 가리고 드러내며 화면에서 경쟁적인 이벤트를 만든다. nyaaahaaa95@gmail.com

  2. 방소윤 방소윤(b.1992)의 페인팅에는 표정, 몸짓, 분위기가 묘사되어 있다. 그는 이미지의 왜곡이나 생략을 통해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의 모호함을 강조하면서 대상에 담긴 감정을 극대화한다. 마치 디지털 화면의 RGB 그래픽을 연상시키는 형형한 색채는 화면 안의 모호한 공간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이처럼 현실의 표정과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어딘가는 크게 벗어난 상상의 이미지는 현실 안에서 이형의 무언가를 탐미하고자 하는 바람을 환기한다. yjdd56@gmail.com

  3. 이운 이운이 그리는 것들은 현미경 속 미생물과 닮아 있거나 빛의 플레어, 터지는 폭죽 등 유동적이고 한시적인 상황이다. 디지털 페인팅으로 구성된 〈fizz〉(2020-2021) 시리즈는 디지털 이미지가 모니터 속에서 보일 때와 출력물에서 보여질 때 발생하는 괴리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출발했다. 화면을 보면서 압력으로 붓질을 가한 형상은 있지만 필연적으로 평평한 디지털 페인팅은 픽셀의 세계를 벗어나 출력물이라는 매개로 나타날 때 압착된 안료의 성질까지 더해져 더욱 평평해진다. 그것들을 모아 쌓아 올림으로써 유발되는 중첩, 반사를 통해 층이 어긋나보이는 이미지들을 제작하며 앞서 말한 괴리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whe2uy@gmail.com

  4. 한지원 한지원(b.1997)은 ‘오타쿠’ 라는 집단과 그들이 탐닉하는 작품 속 세계관의 관계를 조명하는 것을 작업의 출발점 삼는다. 서브컬쳐 세계관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이미지의 본질을 소유하는 것을 가능케 하며, 그러한 세계의 작동원리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오타쿠’라고 상정한다. ‘오타쿠’와 작품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써 환상과 소유욕이 기능하고, 이를 회화로써 그려내는 행위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완벽한 실체화’의 실패를 마주한다. 이를 통해 느끼는 슬픔과 멜랑콜리는 현실이 결코 가상(또는 그 역)을 따라잡을 수 없음에서 찾아오는 감정과도 유사하다. 이러한 정서를 담고 있는 작업은 ‘오타쿠’들에게 당신의 안식처는 아직 건재하노라며 위로를 건네는 동시에, 그러한 안식에 완전히 접근할 수 없는 물리법칙을 마주하도록 그들의 슬픔을 다시 한 번 더 표상하는 양가적인 역할을 한다. umitopinkku@gmail.com
floormap
  1. 이운
  2. 1. fizz!, 2020-2021.
  3. 1-1. flutter, 2021, printed on ohp sheet, 22.7 × 31.3cm.
  4. 1-2. flash, 2020, printed on ohp sheet, 22.7 × 31.3cm.
  5. 1-3. holy sweet potato, 2021, printed on ohp sheet, 31.3 × 22.7cm.
  6. 1-4. a long hot journey, 2020, printed on ohp sheet, 31.3 × 22.7cm.
  7. 1-5. fizz, 2021, printed on ohp sheet, 31.3 × 22.7cm.
  8. 1-6. high mountain flowers, 2021, printed on ohp sheet, 22.7 × 31.3cm.
  9. 1-7. round round ground, 2021, printed on ohp sheet, 22.7 × 31.3cm.
  10. 1-8. buring moth, 2021, printed on ohp sheet, 22.7 × 31.3cm.
  11. 1-9. row row, printed on ohp sheet, 22.7 × 31.3cm.
  12. 1-10. pow, 2020 printed on ohp sheet, 22.7 × 31.3cm.


  1. 방소윤
  2. 2. Parang, 2020, acrylic on muslin, 130.4 × 131.5cm.
  3. 3. Parang, 2020, acrylic on muslin, 130.4 × 131.5cm.
  4. 12. Blocks, 2020, acrylic on muslin, 27.3 × 22.0cm.

  1. 김다정
  2. 4./net―Composition, 2020, oil, paint marker on canvas, 40.9 × 31.8cm.
  3. 5./net―Rotation, 2020, oil, window marker, pen on canvas, 53 × 45.5cm.
  4. 6./net―B-A&LAS-2, 2021, oil on canvas, 53 × 33.4, 53 × 40.9, 53 × 45.5cm.
  5. 7./net―Composition, 2020, acrylic gouache, spray on MDF panel, 30 × 20cm each.
  6. 8./net―Composition, 2020, acrylic, spray on MDF panel, 30 × 20cm each.

  1. 한지원
  2. 9. 돈포겟악토버써드, 2020, oil, lacquer spray, oil pastel on canvas, 130.3 × 97cm.
  3. 10. sayo-nara, 2020, oil, lacquer spray on canvas, 80.3 × 80.3cm.
  4. 11. oshikyara fantasy, 2020, oil, lacquer spray on canvas, mixed media, 145.5 × 112.1cm.
archive
review 1 [이현희]

텍스트 1

레이어끼임사고주의

이현희


어떤 사람들은 간혹 벡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우리는 선과 선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강박 아래 어제는 직선이 되고 오늘은 곡선이 되어 서로의 앵커 포인트를 더듬어 간다. 그것이 열린 패스든 닫힌 패스든 의도치 않게 두 사람이 하나의 점으로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둘에서 하나가 된 순간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소속되었다 착각하며 제왕절개 분만으로 태어났다는 공통점 따위를 찾아 낸다. 밀레니엄 세대로서 새천년을 시작하는 우리는 단절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기나긴 랑데부를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거짓말을 믿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거나 누군가를 파괴할 수 없어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비효율적이고도 자기 희생적인 헌신을 반복하면서. 겨우 이십 세기를 투과한 잔존 동물들은 사랑의 취지가 번식이라던 무정한 동족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곧 아름답기 위해 심장을 순교시키는 일과 같은데, 비트맵 파일처럼 확대하면 확대할수록 초자아가 깨지고 영혼이 무거워지는데도 사랑만 있으면 어디서든 승리할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통증의 해답을 사랑으로 귀결시키면서. 그러나 동시에 깨닫는다. 사랑이 오존층 파괴나 지구온난화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앞 번호의 동급생과 성씨는 같을지언정 신발 사이즈는 다르다는 것을. 이미 무너진 마음을 재건축하는 것보다 허무는 것이 더 빠르다는 것을.


이들은 현 인류에게 배반하는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지론을 주장하면서도 헌혈과 수혈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물리적 모순에 괴로워한다. 인간이란 기호식품일 뿐이라는 좀스러운 생각도 해 보지만 지구는 둥글어서 나를 비추는 눈동자와 교차할 수밖에 없다. 팸플릿에 적힌 전국을 천국으로 읽어 보기도,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풀고 투쟁해 보기도 하지만 우리가 피사체로 태어난 이상 서로의 시선에 저항할 수는 없으니. 어디서든 포즈를 취하고 엉성히 웃어 보지만 인화된 사진 모퉁이에 내 얼굴이 있음을 부정하지 못하고, 그렇게 인간으로서 실패할 때마다 패배한 것 같은 기분에 지배당하며 한 획씩 몸을 갈라 결격 사유를 찾아내려 애쓴다. 심장이 없는 것만으로는 아름다울 수 없으니, 다른 것을 해체시켜야겠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이제 해체된 몸을 전시하는 파국에 이른다. 확대되고 싶지 않으면서도 확대되고 싶은 욕구가 헐떡여, 검수되지 않은 사랑이라도 배식받고 싶어 한다. 잘 보이는 곳에 대일밴드를 붙이고 습관화된 악센트를 탄압하는 자포자기적인 짓을 하기도 하면서. 눈다래끼 하나에도 거창한 안대를 하고 키스 받지 못한 손등에 붕대를 감은 채 말한다. 나를 봐 주지 않는다면 아픈 나라도 봐 줘. 길바닥을 나뒹구는 깡통처럼 요란하게 구걸한다. 깡통도 차면 소리가 나는데 나는 왜 공명할 수가 없나. 파장을 받아들일 너라는 매개가 없는 것인데 나는 왜 나에게 침을 뱉는가.


그래서 작가들은 비로소 너, 나, 우리라는 삼권분립 체제에서 벗어나겠다는 어떤 선언을 한다. 더 이상 공정주의에 시달리거나 나라는 주체를 다수결의 목소리로 재조립할 필요가 없어진다. 오퍼시티를 오십으로 낮춰, 아름다운 죄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나라는 존재를 공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레이어의 순서가 뒤바뀐다고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시야가 흐리다고 나라는 공동존재까지 흐려지지 않으며 단종된 카세트 플레이어도 테이프만 있으면 재생된다. 우리는 모두 낡고 녹슬어 가는데, 나는 왜 아름답기 위해 확대되는 것을 죽음과 같이 생각했는지.


우리는 간혹 선이 이어지기도 끊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고는 한다. 누군가를 따라 허리둘레를 재거나 기차를 타고 동묘까지 달려가면서, 나에게 부족한 건 너뿐이라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지지 마시오'라는 안내문을 만지거나 '당기시오'라고 적힌 문을 밀었다고 해서 최악의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불법 유턴을 하거나 좌측통행 계단에서 우측으로 걷는다고 지구상의 위도와 경도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나라는 이율배반적 인간을 설명하지 않는다고 네가 바라는 존재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쯤 분실한 적 있는 믿음을 목격하게 된다. 단절된 선을 쥐고 절단면만 바라보다 뒤돌았던 그런 순간들을. 그 실패는 처음부터 하나가 될 수 없는 성질을 지녔음을 반증한다. 하나의 이름을 둘로 나누어 가지느니 독립된 미완성체로 호흡하겠다는 결심. 그렇게 부서져 버린 나를 오리지널리티로 치환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우리로서 완성시킨다.

review 2 [박시내]

텍스트 2

어떤 얼룩들

박시내


출처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의 동쪽 복도에는 대리석을 모사한 네 개의 패널이 있다. 사실 패널이라기보다는 프레임마저 모두 그려 넣은 것이기 때문에 그냥 그림이라고 하는 편이 알맞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둘러싼 성인들의 모습을 유사하게 그려내어 서사를 제시하는 상단의 이미지와 비견되게도, 하단의 대리석 그림은 전체 구성에서 장식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목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패널의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화가는 대리석을 그대로 그려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붓으로 물감을 튀겨내어 벽에 맺히는 물방울의 우연성을 통해 네 가지 대리석을 각기 다르게 그려냈다. 거진 몇 세기는 건너서야 미술사에 그 이름이 붙는 테크닉인, ‘드리핑(dripping)’ 기술이 그 오래된 수도원의 벽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실제와 유사하게 그려진 와중 갑작스레 등장하는 불규칙한 물감 자국은, 그 얼룩 자체로 얼룩을 생산한다. 대리석의 얼룩들이 물감의 얼룩으로 우리의 눈앞에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얼룩은 단순한 얼룩으로 남아있지 않고자 하며, 대리석은 대리석을 닮지 않고자 한다. 물감으로 그려진 얼룩과 대리석 얼룩의 낙차는 아주 깊은 듯하나 전혀 그렇지 않기도 하다.


소위 ‘포스트 인터넷 회화’라고 불리는 일련의 경향은 하나로 귀결되기보다는 스펙트럼의 형식을 띠고 있다. 온라인상의 도구를 기반으로 실험적 수행을 전개하거나, 이를 이용하여 제작된 웹 기반의 결과물을 제시하는 작업들은 새로운 이미지의 세계에 대한 회의와 동경을 동시에 표출한다. 그러나 사실 평평한 스크린 위에서 이미지의 최소 단위는 그렇게 눈에 띠는 요소는 아니다. 해상도가 계속해서 천정부지로 폭증하는 것과 별개로, 인간의 눈이 그 차이를 인식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최소 단위는 매끈한 세계 위에 오점으로 등장할 때 비로소 가시화 된다. 따라서 이런 회화의 경향은, 작업의 최종 수행 장소가 현실 세계이기에 발생하는 간극과 낙차를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삼고 있다. 매끈하고 평평한 디지털의 이미지가 가장 전통적인 매체인 캔버스 위에 나타나는 순간,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물성과 형상에 대한 매혹이 이미지의 근원을 탐구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차리리 나쁘겠어요》에서 일컫는 ‘나쁜 것’이란, 그 낙차에서 비롯된 우연한 얼룩의 성질과 형상일 것이다. 포스트 인터넷 회화에서 제시하는 픽셀과 붓질간의 차이는 시선을 가로막고 신경 쓰이게 하는 불안정한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전시의 작업들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그 나쁨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인데, 애초부터 작가들의 관심사는 고화질의 해상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이 계속해서 신경 쓰는 것은 완벽함에서 탈락된 얼룩들이다.


구체적 형상이 사라진 뒤의 잔여물을 그려내는 김다정의 작업이 디지털 세계의 얼룩과 캔버스 위의 얼룩을 겹쳐내려 한 시도라면, 방소윤의 작업은 아예 얼룩의 모호함이라는 특성을 방점으로 삼아, 회화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와 디지털의 최소 단위를 교차시킨다. 배경의 찢겨짐과, 붓 결이 역방향으로 슥 하고 지나간 흔적, 마스킹 테이프를 뗄 때 등장하는 캔버스 표면의 미세한 도드라짐, 서로 다른 보조제로 인해 발생하는 광택의 미묘한 차이와 같은 요소들은, 캔버스의 흠결인 동시에 완벽한 세계에 흠결을 내는 ‘나쁜 것들’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런가 하면 한지원은 나쁜 얼룩의 세계에 완전히 몰입한다. 현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차원에 대한 관심은 이루어질 수 없는 절절한 짝사랑으로부터 비롯된 세계로, 엉성하고 연약하나 그렇기에 애틋한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낸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비틀리고 왜곡된 이미지를 포개어 두면서 그 세계가 확실한 가짜의 세계라는 것을 명명한다. 이운의 작업 또한 나쁜 것들에 대한 순응을 보여준다. 다만 그의 작업은 얼룩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유일하게 이를 숨기는 것에 집중한다. 그는 얼룩의 낙차를 줄이기 위해, 캔버스가 아닌 인쇄물의 형태로 작업을 제시하나, 시도와 동시에 빠르게 그 실패를 선언한다. 인간의 제스처가 아닌 기계의 분사로 제작된 이미지일지라도, 그것이 실제의 물성을 가지게 된 순간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는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시도는 얼룩의 필연적 실패를 가시화하는 나쁜 것들에 대한 인정일 것이다.


프라 안젤리코가 얼룩으로 형상화한 신성과 마찬가지로, 캔버스 위의 얼룩들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완벽한 세계 위의 균열을 가시화한다. 즉 얼룩이란 열화된 추출물로부터 비롯되어 우연하게 솟아오르는 이미지로서, 비트와 픽셀을 넘어서는 이미지의 출발점을 상상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렇기에 완벽하지 못함을 순순히 인정하고 차라리 나쁜 것으로 남겠다고 툭 내뱉는 이 시대의 선언은 그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도 탄생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얼룩들은 또 다른 이미지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credit

김다정 방소윤 이운 한지원

2021.05.21-06.05

갤러리175


주최 갤러리175

그래픽 디자인 홍석표

사진 촬영 박승만

텍스트 이현희 박시내

기획 김얼터

text
인터넷에서는, 아무도 당신이 회화라는 것을 모릅니다. ㅡ 황재민

인터넷에서는, 아무도 당신이 회화라는 것을 모릅니다.

황재민


1.


인터넷 회화, 혹은 디지털 회화라는 이야기가 가능할까? 회화엔 네트워크 연결을 가능케 하는 플러그도 없고 와이파이를 연결할 수 있는 무선 접속 장치도 없다. 온전히 이진수로 표현될 수 없으며 데이터를 직접 받아들일 수도 없는 특정 개체가 어떻게 디지털화(digitalized)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는 방향이 여러모로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 혹시 ‘포스트-인터넷(post-internet) 회화’라는 이야기는 가능할 수 있을까요? 앗 헉 그것은…


“인터넷에서는, 아무도 당신이 개라는 것을 모릅니다. (On the Internet, nobody knows you're a dog.)” 1993년, 만화가 피터 스타이너(Peter Steiner)가 『더 뉴요커(The New Yorker)』를 통해 발행한 카툰 한 장은 인터넷이 지닌 어떤 속성을 여러모로 압축하여 보여준다. 컴퓨터 앞에 앉은 검은 강아지가 아래에 있는 점박이 강아지를 향해, 조금 들뜬 표정으로, “인터넷에서는, 아무도 당신이 개라는 것을 모른다”며 충고하는 이 카툰에서는, 인터넷이 근본적으로 익명의 공간, 그러므로 그야말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사실이 표현된다. 인터넷은 개의 신체와 인간의 신체가 분별되지 않는 비물질적 공간이며, 개의 의견과 인간의 의견이 같은 것으로 취급될 수 있는 평등한 공간이다. 서로 멀리 떨어진 노드를 연결하는 새로운 네트워크로서 인터넷은 상상도 못한 변환을 세상에 주며, 이 광활한 인터넷 세계는 버튼 하나, 클릭 한 번, 네트워크를 통제할 수 있는 작은 움직임 하나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을 바꾸면, 이건 연결이 불가능한 특정 상황이 아니라면 이 모든 놀라운 변화를 체험할 수 없다는 뜻이 되는 것 아닐까? 실제로 이 사실은 인터넷의 중대한 약점 중 하나였으며, 그렇기에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약한 고리를 보완하기 위해 엄청난 인프라가 투자된다. 단말기, 네트워크, 노드에 이르기까지, 물적 토대가 계속해서 갱신되고 보완된 이후 인터넷이 보여주는 전과 다른 어떤 세계는 결과적으로 보편화되었다. ‘포스트-인터넷(Post Internet)’, 그러니까 ‘인터넷 이후’의 세상에 대해 말하는 몇 가지 의견은 이처럼 보편화된 인터넷이 우리의 감각과 무의식으로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는 통찰을 담아낸다. 인터넷은 더 이상 새로운(novelty) 것이 아니라 평범한(banality) 것이 되었으며,1 연결은 이제 24시간 가능한 무의식적인 것이 되었다. 일상 속으로 깊게 보편화된 인터넷의 감각은 네트워크에 직접 연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개인이 ‘인터넷적인 것’을 충분히 환기하고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Climate)을 만들어낸다. 더 이상 연결은 필요 없으며 여기서는 당신이 네트워크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이다.


과거, 작가이자 이론가인 페터 바이벨(Peter Weibel)은 컴퓨터를 포함하는 새로운 기술 매체가 회화, 그리고 조각에 이르는 역사적 매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 전망한 적 있다. 뉴미디어 이론가의 적극적 공상에 가깝게 들렸던 이 이야기는, 그러나, ‘인터넷적인 것’이 네트워크에 직접 연결되지 않은 오프라인 시공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인터넷 이후’의 의견과 엮이며 다시 한번 강조된다. 인터넷이 잠재된 당신-네트워크가 디지털화될 수 없는 종류의 역사적 예술 범주, 그러니까 회화나 조각 등을 만들어낼 때 인터넷의 영향은 해당 개체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포스트-인터넷 회화’, 혹은 ‘포스트 디지털 회화’라는 이야기를 위한 기반은 이렇게 만들어진다.2


‘포스트-인터넷’이라는 수사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점은 2006년 즈음으로 알려져 있다. 작가이자 큐레이터인 마리사 올슨(Marisa Olson)은 모든 종류의 예술 실천에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개입되기 시작한 상황을 ‘포스트-인터넷’이라고 호명했다.3 당시 이것은 분명 새로이 등장한 감각적 상황을 묘사한 구체적 수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등장한지도 어느새 약 15년이 지났고, 그렇기에 이 말 역시 어느 정도는 낡거나 혹은 성숙하고 풍부해져, 이제는 여기에 무엇이 어떻게 쌓여 있는지 대략적으로 들추어보는 일이 가능해진 시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스트-인터넷 회화’라는 특정 범주가 최소한 장르로라도 기능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그것은 확실치 않은 것 같다. 물론 ‘포스트-인터넷 예술(post-internet art)’이라는 말은 가능하다. 어떤 작가들은 이 범주, 혹은 경향, 혹은 그게 어떤 것이든 거기에 참여하며 자신의 의견을 명백하게 밝히고, 그건 지금도 동시대 미디어 환경에 대한 중요한 진술로 기능한다. 그러나 '포스트-인터넷 회화'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같은 단언이 가능할까? 아니라면 왜일까?


2.


다양한 이야기가 가능하겠으나, 여기서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는 진술을 옮겨 살펴보기로 한다. 작가 아티 비어칸트(Artie Vierkant)는 2010년, ‘포스트-인터넷’이라는 수사가 점차 구체화되던 초기,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 글을 공개했다. 이 글을 통해 작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확하게 한다. 인터넷은 세상을 바꾸었으며 ‘인터넷 이후’의 환경은 그 변화를 공식화하거나 보편화했다. 무의식 차원으로 개입한 인터넷은 유한한 튜링 머신인 컴퓨터의 계산 가능한 영역을 확대했으며, 이 과정에서 세계 전체가 어쩌면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새로이 재편된다. 이와 같은 생각을 따라, 비어칸트는 인터넷 이미지를 다양한 형태로 분산, 또는 변형시키는 작업의 방법론을 합리화한다. 나아가 이 변형은 지난 세기의 전유(appropriation)라는 방법과는 다른 종류의 것으로 설명되는데, 여기서 변형을 위해 선택되는 물체는 근간을 데이터의 차원에, 나아가 인터넷의 차원에 두고 있으며, 그러므로 분산, 또는 변형 과정에서 원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원본 없는 세상의 논리를 따라, 이를테면 ‘무빙이미지(moving image)’는 조각으로 전유될 수 있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원래 ‘무빙이미지’였다는 사실을 돌이킬 필요도 없다. ‘무빙이미지’에서 조각으로, 디지털화된 예술에서 디지털화될 수 없는 예술로, 서로 다른 두 매체가 ‘인터넷적인 것’을 무의식에 담은 개인을 경유해 이동할 때 디지털 네트워크 속에서 이진수로 저장된 ‘인터넷적인 것’의 존재론은 미술관에 전시될 수 있는 실제 물질로 옮겨질 수 있다. 이 의견은 일견, 역사적, 또는 ‘전통적’ 매체로서, ‘인터넷 이후’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 물질-몸을 지닌 회화를 새로운 물질의 해석 속으로 재위치시킬 수 있는 근거로도 읽힐 수 있을 듯 보인다. 그러나 비어칸트의 작업은 대중매체(mass media) 속에 용해된 스펙타클로 멸시되던 얄팍한 이미지를 구출할 수 있는 미학적 방법으로 이용될 따름으로, 그러니까 비어칸트의 작업과 글은 ‘인터넷적인 것’을 실제 전시장으로 빼내오기 위한 분명한 알리바이를 설계하지만, 그것은 이미지라는 범주를 위한 것이지 회화를 위한 것이 아니며, 사실 이 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실존한다.4


그런 한편, ‘인터넷 이후’의 감각이라는 새로운 미학적 탈출구를 알리바이 삼아, 역사적 매체인 회화의 쓸모를 주시하려는 흐름 역시 존재하는 것 같다. 디지털 예술을 위한 플랫폼 ‘리좀(Rhizome)’에 실린 글에서, 평론가 알렉스 베이컨(Alex Bacon)은 이제는 익숙한, 평범한 일상의 조건 중 하나가 된 스크린을 회화의 일부로, 나아가 ‘지지체(support)’로 삼는 사례를 나열한다. 로버트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와 같은 과거 거장이 모더니즘 미술의 내부에서 회화가 가졌던 막대한 중력을 교란하고자 그것의 내부 전통에서 탈각된 물건을 자유로이 사용했듯, 현재 어떤 회화 작가들은 모니터 스크린이나 스마트폰 디바이스 등을 레디메이드 삼아 회화를 위해 쓰며 ‘인터넷 이후’의 환경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한다. 이 과정에서 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문제와 계속해서 부딪혀야만 했던 회화는 자신의 내부로 스크린이라는 대상을 편입시키며, 스크린을 통해 중계될 수 있는 다양하고, 또 새로운 문제들에 참여할 수 있게끔 갱신된다.5


좀 더 가까운 사례도 있다. ‘인터넷 이후’를 환기하는 감각이든, 혹은 존재론이든, 이와 같은 영역을 다루려는 많은 실천이 한국에서도 있어 왔다. 그 중 몇몇 역시 회화라는 틀을 경유해 이 문제를 다루고자 했는데, 이를테면 정희민은 스케치업 등을 이용해 조성한 이미지를 유화 물감으로 그려내고, 겔 미디엄을 활용해 캔버스 위에 투명한 얼룩처럼 보이는 물질의 레이어를 한겹 더하며 가상적 감각에 가까운 그 무엇을 시각화했다. 이제 거의 그만의 시그니처처럼 보이는 이 방법은, 촉각성이 특히 유실된 ‘인터넷 이후’의 환경에서 개인으로 살고 예술가로 창조하며 겪는 불가해한 상실, 즉물적 현실에 대한 상실을 강조하기 위한 회화적 제스처로 읽히곤 했다.6 이 상실은 실상 아티 비어칸트와 같은 작가들이 새롭게 발생한 해방이라 여긴 감각의 양면처럼 보이는데, 한 쪽에서 기술이 이미 세상을 바꾸었으며 드디어 인간의 무의식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기쁨을 표할 때, 다른 쪽에서는 우리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 기술이 우리에게 선사한 새로운 불가능성을 발견하곤 눈물 흘린다.


미학자이자 평론가인 곽영빈은 정희민의 작업을 다룬 글, 「디지털 인터페이스와 모눈종이 사이: 정희민의 형상과 배경」(2020)에서, 작가가 실체를 상실한 디지털 이미지를 묘사함으로써 상실감의 멜랑콜리를 환기하는 한편,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이분법에 빠지는 대신 배경과 형상이라는 위계적 구분을 유예시키며 세계의 변화한 조건을 성찰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는다. 정희민이 특정 현상에 대한 즉각적 감각을 단순 시각화하는 것에 머무는 대신 세계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개인전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If We Ever Meet Again》(2020)에서 활용한 모눈종이의 격자 구조에서 드러난다. 이 격자 구조는 디지털 이미지의 픽셀 구조를 표시하는 동시에 모더니즘의 상징물인 그리드(grid)를 동시에 환기하는데, 말하자면 작가의 성찰은 ‘인터넷 이후’의 환경을 탐구하며 이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탈락된 매체성, ‘회화적인 것’을 굳이 함께 탐구하는 과정에서 파생된다.7


여기서 잠시 억측하자면, 그렇다면 ‘인터넷 이후’의 분열적 환경에서 회화의 쓸모는 상실된 현대성을 가장 강력하게, 동시에 가장 불필요하게 환기함으로써 다시 성립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호한 상황은 변화한 미디어 환경이 보다 분명하게 지각되기 이전부터 회화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회화는 모더니즘과 연루될수록 위험해지므로 그로부터 반드시 벗어나야 옳다. (그것은 물화된 상품이며 시장의 토큰이다. 혹은 그린버그가 개념화한 ‘평면성’의 상징이며 억압적 현대성 전체를 상징한다.) 하지만 현대성이 유실된 현재, 회화는 낡은 현대성을 무의식적으로 자동 기술하며 첨단의 기술과 연루될 수 있다. (고루한 모더니즘의 상징물로서 회화라는 절대적 과거가 도입되는 순간 시간의 위상이 재편된다.) 이때 회화는 아무 의미를 담지 못하는 것이 옳은, 빈 칸에 가까운, 모호한 형식으로 귀결되며, 반드시 회화여야만 하는 필연성을 손실하며 그것은 옳은 일이다(라고 간주되는 듯하다). 어쩌면 인터넷 이후의 환경이 촉발한 매체적 혼란과 상실을 회화는 전부터 미리 앓고 있었다. ‘포스트-인터넷 회화’라는 언술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화가 오로지 빈 칸이라면, 여전히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것을 하는가?”라는 힘든 질문 없이 피상적으로 매체를 다루는 위악이 여전히 정말로 유용한가?


3.


머리가 아파 오는 힘든 질문에 섣부르게 대답하기에 앞서, 필연성과 자율성을 갖출수록 유독해지기에 특정성을 주장하기 어려운 회화가 갖는 모호한 매체성을 긍정하기 위한 사례들에 초점을 잠시 맞춰보도록 한다. 이를테면 데이빗 조슬릿(David Joselit)은, 2009년에 쓰인 그의 글 「자기 옆의 회화 (Painting Beside Itself)」에서, 동시대 미술의 영역에서 펼쳐지는 회화의 생존 전략을 ‘타동적(transitivity)’이라는 말로 검토했다. 갱신된 미술의 영역에서 회화가 갖는 치명적 약점 중, 그 자체로 완결된 것처럼 보이는 단일한 물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조슬릿은 회화는 사실 단일한 물체가 아니라, 언제나 모종의 네트워크에 속해 있었으며 이를 의식한 실천이 있었다고 부연한다. 이런 종류의 작업들은 회화를 단일한 물체로 취급하는 대신 퍼포먼스, 설치 등 회화 바깥의 매체를 회화와 연결 지었으며, 그것으로 회화의 내부와 외부를 함께 엮으며 모종의 네트워크를 시각화, 혹은 형성했다. 어떤 물질의 특정한 행동을 표현한다는 의미의 ‘타동사의(transitive)’라는 단어로부터 쓰임을 따와, 조슬릿은 이를 ‘타동적’ 회화라고 정의하는데, 여기서 회화는 여러 매체와 상황이 얽혀 만들어진 모종의 네트워크를 위한 하나의 통로(passage)처럼 사용된다.8 ‘타동적’ 회화가 포함된 모종의 네트워크 상황 속에서 회화의 권력은 효과적으로 분산되며, 동시에 이 네트워크는 회화를 중력 삼아 방만하게 펼쳐지지 않고 무게 중심을 잡을 수 있다.


'타동적' 회화는 미학화된 사물이 무조건 비가시적이고 실질적인 네트워크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동시대 미술의 진단을 바탕으로 한다. 모든 형태의 사물은 전시되거나, 소장되거나, 중단되거나 옮겨진다. 이 실질적인 네트워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물은 없으며, ‘인터넷 이후’의 환경이라는 변환은 이 네트워크를 단순히 물리적인 것으로 멈춰두지 않는다. 이제 네트워크는 느린 지리적 속도에서 빠른 디지털 환경의 속도에 이르기까지, 멈출 수 없는 다양한 속도 속에서 순환될 수밖에 없으며, 이 네트워크에 입장한다면 회화의 몸체 역시 단일하지 않은 것으로 분산되고 파편화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타동적’ 회화라는 진단은 회화를 물화라는 오래된 비판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고 나아가 긍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 글에서, 네트워크의 용법은 다소 모호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미술 제도와 관계 맺는 ‘사회적인 것(social)’의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술계’ 내부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또한 다종화, 다각화된 미술 문법이 합쳐지고 어울리는 작업 내부의 네트워크나 광대한 전지구적 인터넷 네트워크를 지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조슬릿은 네트워크의 의미를 특정하지 않고 다소 임의적으로 내버려두는데, 이처럼 확장된 네트워크의 서술은 회화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매체론과 ‘인터넷 이후’의 환경에 대한 논의가 겹쳐지는 단초가 되는 듯 보인다.


그 후 몇 년 뒤 쓰인 또 다른 글 「(시간을) 표지하기, 기보하기, 저장하기, 사변하기(Marking, Scoring, Storing, and Speculating (On Time)」(2016)에서, 조슬릿은 보다 분명한 어조로 ‘인터넷 이후’의 환경이 촉발한 모종의 상실이 오히려 회화의 매체성을 새로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쓴다. 디지털화되고 세계화된 오늘의 환경에서, 회화를 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예술 소비는 가속화된다; 모든 예술 작품은 실은 내재적으로 절대 해설될 수 없는 영원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제 그것은 핸드폰으로 촬영된 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로, 블로그로, 메신저로 흘러 들어가 영원히 재생되지 않을 거대한 정보의 저수지로 수렴되고 만다. 이처럼 산산이 분산되어버리는 회화는 이제 그 어떤 힘도 지닐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조슬릿은 초가속적으로 회화를 분산시키고 거의 무한하게 시간을 저장하는 디지털 이미지가 스펙타클로 전이되는 대신, 회화를 위한 일종의 ‘스코어(Score)’로 기능할 수 있다는 사변을 전개한다. 디지털 이미지는 마치 악곡을 위한, 혹은 퍼포먼스를 위한 '스코어'처럼 회화의 영원한 시간성을 보관하며, 여기서 사진, 곧 디지털 이미지를 통해 매개된 회화는 특유의 즉물성을 잃은 피상적 매체가 아닌, 무한한 회화의 발생 가능성을 그 자신 안에 잠재하고 있는 형식이 된다. 이것은 여전히 분산이지만, 흩어버리고 빻고 사라지게끔 촉진하는 분산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잠재된 감각을 매개하고 새로 인식하게끔 돕는 악보적 분산이다. 분산된 디지털 이미지의 순환을 곧 회화에 내재된 시간과 경험을 위한 일종의 기보법으로 다시 생각하며, 그는 모종의 상실을 다시 한번 긍정하고자 한다. 오늘날 세계화되고 디지털화되는 세상은 가장자리와 중심의 중력을 재배치한다. 이제 중심은 없으며, 회화 역시 이 재배치 과정을 공유한다.9


이와 같은 사변을 통하여, 조슬릿은 ‘인터넷 이후’의 파편적 환경이 회화의 기초적인 조건을 상실시키고 불가하게 만들었을 수 있지만, 어쩌면 동시에 그것을 성공적으로 갱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인터넷 이후’의 환경에서 작동할 수 있는 회화를 위한 담론의 예로 흥미롭지만, 한편으로 시간이라는 범주를 회화와 연결시키며, 이 안에 현상학적이며 나아가 본질적인 무엇이 반드시 잠재한다는 전제에 기반하기에 부담스럽다. ‘인터넷 이후’의 환경이 촉발한 모종의 변화가 회화에게 시간을 다시 갖추게끔 조장한다는 말은 아름답다. 하지만 이제 세상에 어떤 즉물적 현존이 가능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상황에서 회화가 그것을 갖출 수 있으리라는 말은, 누구에게도 독해되기 어려운 가상의 암호를 회화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으로 연결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독일의 미술사가이자 평론가인 이자벨 그로(Isabelle Graw) 역시, 이제 회화는 단순히 단일 개체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네트워크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을 공유한다. 저서 『회화에 대한 사랑(The Love of Painting)』(2019)에 실린 한 챕터를 통해, 그로는 ‘네트워크 회화(network painting)’가 폐기되었던 회화의 매체성을 적법하게 만드는 캐치프레이즈처럼 사용된다는 사실을 짚는다. 그의 글에서, ‘네트워크 회화’가 가능해지는 배경은 두 가지다. 첫째는 1990년대 이후,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보편화되고 메타 미디엄으로 부상한 컴퓨터의 영향이 미술사 내부를 침범하기 시작했다는 점, 그로 인해 어떤 미적 매체도, 심지어 회화조차, 그 내부적 논리만으로는 문제적일 수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사회 과학의 영향인데, 이를테면 브루노 라튀르(Bruno Latour)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과 같은, 사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론틀이 (놀랍지 않게도) 예술계에서 큰 환영을 받은 결과 “네트워크”라는 단어의 쓰임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다. 글에서 그로는 ‘네트워크 회화’를 다소 의심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더니즘의 순수성으로부터 회화를 빼낼 수 있는 용례로 긍정하면서, 나아가 회화가 ‘인터넷 이후’의 새로운 사회적 세계를 포함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짚는다. 이를테면 이것은 SNS 같은 것이 회화의 일부로 안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10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작가 에이브리 싱어(Avery Singer)의 작품을 분석한다. 에이브리 싱어는 ‘예술계’ 흔히 안에서 일어날 법한 상황을 상상한 뒤, 그것을 스케치업 3D 모델로 연극적으로 묘사, 이후 에어브러쉬를 사용해 환영성을 띄는 회화로 제작한 연작을 통해 유명세를 얻었다. 작가는 뉴욕과 베를린을 순환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시장에서 주목받고자 애쓰는 장면, 예술계 바깥의 논리로 보면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지나지 않는 퍼포먼스 연출의 고단함, 그리고 관례화된 스튜디오 방문의 공허한 풍경 등, ‘예술계’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 애매한 사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포착한다. 그로는 이 연작에 대해 설명하면서 작가가 SNS를 통해 작업 과정이나 스케치 등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행위는 작가의 SNS 포스팅에 ‘좋아요’ 따위로 반응하는 불특정 디지털 관객들에게 이 예술의 사회적 관계에 포함된 듯한 동질감을 주며, 이것은 작가가 디지털화되고 세계화된, 중심과 가장자리를 구분할 수 없는 세상을 향해 회화를 분산하고 있다는 제스처로 기능한다. 싱어는 이 연작을 주로 흑백의 색채로 표현했는데, 절대로 디지털 스크린 속의 그 색과 똑같이 출력될 수 없는 다른 색들과는 달리, 흑백은 스크린과 실제의 격차가 가장 적은 색이다. 그로는 이 흑백의 사용이 디지털 디바이스와 물리적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회화가 더 적절히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한 근거라고 쓴다.11


삶을 매개로 가상과 실제를 융합하는 SNS의 세계는 ‘인터넷 이후’의 환경을 대표할 수 있는 생생한 사례로 꼽힌다. 그런 만큼 회화 역시 이 세계에 포함되어 기능할 수 있다면, 그 역시 갱신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위의 글에서, 그로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짚는다. 그것은 오늘날의 경제와 얼마간의 관련이 있는데, SNS를 통해 구축된 사회적 관계가 이제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단위화된다는 점, 이를 통해 삶을 결국 가치 있는 경제적 추출물로 환원시키고 만다는 점이다. ‘생명권력(bio-power)’의 논의를 따라, 그로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전시하는 행위가 자발적으로 경제적 추출의 대상이 되는 행위와 동일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12 게다가 어쩌면 여기에 또 하나, 맥락이 다소 다른 비판적 의견을 더할 수도 있을 듯하다. 이를테면 소셜 미디어의 디지털 세계와 네트워크로 접합된 회화는, 자연스럽게 “플랫폼 자본주의(Platform Capitalism)”의 비가시적 착취에 적극 영합하는 예가 될 지도 모른다는 의견 말이다. 표정을 살짝 진지하게 바꾸어 계속해 말해보자면, 오늘 날 거대 테크 기업은 단순한 정보의 소유자를 넘어 사회 기반 시설의 소유자로 변모하고 있다, 자산 대신 데이터를 사유화한 이른바 ‘린 플랫폼(lean platform)’은 초-외주화 모델을 통해 이익을 얻고 전세계 비공식 시장의 노동자들이 초단기 일자리를 얻기 위해 스마트폰을 구입하기를 강제한다, 이 수익은 다시 거대 테크 기업으로 환원되며, 소셜 미디어의 네트워크를 예술이 자신의 기반으로 삼는 행위가 이 착취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대충 이런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13 이것은 단지 오래된 비판을 반복하는 함정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SNS가 ‘네트워크 회화’를 적극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단지 힘차고 긍정적인 논지로만 남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네트워크 회화’는 어떤 이유에선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회화의 전략을 긍정하기에 좋은 담론적 렌즈처럼 보인다. 그러나 즉물적 경험의 신화화냐, 혹은 ‘인터넷 이후’의 세계를 차츰 정복한 플랫폼과의 착취적 밀월이냐, 갱신된 회화가 기댈 수 있는 담론의 지평은 나름의 어려움을 각기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 조슬릿과 그로의 의견 모두 (말하자면) ‘회화적인 것’을 퍼포먼스로, 설치로, SNS로, 외부로 확장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조금은 불만스럽다. 혹시 ‘회화적인 것’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가능한, 그런 종류의 확장은 없을까?


질문에 대한 가설적 대답으로, 호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이자 이론가 마크 티트마쉬(Mark Titmarsh)의 소수 의견을 더해 둔다. 오늘의 세계를 점유한 모종의 조건, 디지털화와 세계화에 더해, 그는 한 가지 변환을 덧붙인다. 그것은 생태적 전환(ecological turn)이다. 생태적 사고 아래, 어디에도 독립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유기체적으로(organic) 연결된다. 유기체적인 사고 아래 세계를 본다면 거기에는 명확히 호명 가능한 개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무, 뿌리, 땅, 미생물, 습기와 기타 등등, 개체는 역동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으로 세계를 이룬다. 마크 티트마쉬는 생태학적 담론을 미적 실천에 대입해, 회화 역시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개체이며 단일한 개체로 존재할지라도 여전히 네트워크에 속해 있다는 생각을 가능케 한다.14


생태적 모델을 경유하면, 이제 더는 어디에도 단단한 것은 없다. 지구의 미래 자체가 불투명한데 그 어떤 것이 투명하거나 단단할 수 있겠는가? 기존에 단단함을 지닌다고 생각되었던 영역은 천천히 해체되며, 그 ‘단단한’ 영역의 내부에 미리 설정되어 있었던 정보를 허문다. 이와 같은 진단은 내부를 향해 더 많은 네트워크를 찾고 발견할 수 있다는 당위로 이어지며,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자면 성찰적인 네트워크가 가능해진다.


그 스스로 확장된 회화 매체를 탐구하는 작가로서, 티트마쉬의 논지는 ‘회화에서 확장이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 것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그는 회화가 자문(self-questioning)으로 깊어지며 확장되는 상황을 거론하는데, 이 자문의 목록은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다 - ‘무엇이 회화를 위하여 적절한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물감은 제거될 수 있는가?’, ‘조각이 회화에 더해질 수 있을까?’, ‘무엇이 더해질 수 있고 무엇이 제거될 수 있는가?’와 같은 실용적인 질문에 이르기까지,15 회화가 갖는 미술사적 유산은 여기서 탈출해야 할 억압이 아니라 다양한 자문을 가능하게 만드는 풍부한 데이터베이스로 치환된다. 티트마쉬는 확장 자체를 생태적인 모델, 개체가 개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속해 있는 세계와 항시 역동적으로 상호교환하는 모델로 재정의하는데, 이것은 ‘네트워크 회화’가 반드시 모종의 외부를 경유하지 않고도 작동할 수 있는 알리바이로 활용될 수 있다.


4.


나가며, 전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차라리 나쁘겠어요》는 “차라리 나쁘”기를 택한다. 전시는 비물질화된 세계의 상실을 다루는 회화에게 짝사랑이라는 정념을 부여한다. 회화는 짝사랑의 달인이며 그러므로 상실의 달인이다. 그러나 사랑이 때로 큰 대가를 요구하는 것에 비해, 짝사랑은 고통스럽지만 안전한 선택이다. 짝사랑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역설적으로 “사랑과 연애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사랑할 수 없기에 이것은 나쁘지만, 나쁜 상태를 유지하며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긍정적이다. 회화 역시 마찬가지로, “차라리 나쁘기”를 의도적으로 선택할 때 가능해지는 절박한 지속이기에 의미 있으며 나아가 가능해지는 형식이다.16 그러므로 “‘포스트-인터넷 회화’는 가능할까?”라고 묻기보다는, “회화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라고 묻는 편이 여전히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 환경이 바뀌고 상황이 변화해도 회화는 자유로운 짝사랑의 달인으로 기둥 뒤에 숨어 세상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이후’의 상황을 감각했던 예술가들에겐 어느 정도 선구자적인 성격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인터넷에 익숙했으며 그러므로 개인이 온전히 감각할 수 없는 이미지의 광대한 저수지로부터 의미 있는 ‘글리치(glitch)’를 찾아내는 데에도 익숙했다. 그러나 반복해 말하듯, 이 새로운 상황이 발견된 지 꽤 시간이 흘렀고 그렇기에 이 상황의 질서 역시 조정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인터넷이 새로운 것에서 평범한 것이 되었다는 자각 역시 점차 평범한 것이 되고 말았으며, 나아가 이미지의 저수지 역시 어쩌면 빠른 시간 안에 분류되고 정렬될지 모른다. 그리고 이 정렬은, 아마도 인간의 힘으로 인한 결과가 아닐 것이다. 또한 단시간 내 ‘인터넷적인 것’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 넘은 계산에 의하여, 인간에게 가장 친절한 형태로 제공될지 모르며, 정보는 곧 실제 가치를 담지하기 시작할지 모른다. 정보가 곧 가치가 된 상황에서 ‘글리치’를 발생시키는 것은, 하나의 사회 운동을 통해서야 겨우 조직될 수 있을 묘기가 될 텐데, 이제 자유는 없고 무법지대는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예술에겐 불행일지 몰라도, 이것은 분명하게 옳은 방향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어떤 것들은 옳고 맞고 좋고 아름답기를 위할 때가 아니라, 그러느니 나쁘기를 선택할 때 드러날 것이다. 회화는 마치 어떤 방향도 바라보지 않는 듯한 혼잣말, “차라리 나쁘”겠다는 혼잣말 속에서 지속된다. ”그런데, 나쁘기를 선택하는 회화는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17



1ㅤMarisa Olson, 「Postinternet: Art After the Internet」, 『Foam Magazine 29』, Winter 2011, 61p.

2ㅤPeter Weibel, “The Post-Media Condition”, medialabmadrid.org, 2006. 원문 소실, 다음의 링크를 통해 확인, 2021년 6월 28일 접속. 가서 보기.

3ㅤRégine Debatty, “Interview with Marisa Olson”, we-make-money-not-art.com, 2008년 3월 28일, 2021년 6월 28일 접속. 가서 보기. 해당 인터뷰를 통해 마리사 올슨은 2006년, 『타임아웃(Timeout)』에서의 인터뷰를 통해 ‘포스트-인터넷’이라는 수사를 처음 거론했다고 언급하지만, 원문이 소실되어 찾아볼 수 없다. 같은 말이 2008년 발표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4ㅤArtie Vierkant, “The Image Object Post-Internet”, jstchillin.org, 2010년 12월 14일, 2021년 6월 28일 접속. 가서 보기.

5ㅤAlex Bacon, “Surface, Image, Reception: Painting in a Digital Age”, RHIZOME, 2016년 3월 24일, 2021년 6월 28일 접속. 가서 보기.

6ㅤ김홍기, “거미 여인”, 2021년 7월 28일 접속. 가서 보기.

7ㅤ곽영빈, 「디지털 인터페이스와 모눈종이 사이: 정희민의 형상과 배경」,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입주 작가 비평 모음집』, 국립현대미술관, 2020, 83-87p.

8ㅤDavid Joselit, 「Painting Beside Itself」, 『October 130』, Fall 2009, 127-129p.

9ㅤDavid Joselit, 「Marking, Scoring, Storing, and Speculating (On Time)」, 『Painting Beyond Itself: The Medium in the Post-Medium Condition』, Isabelle Graw, Ewa Lajer-Burcharth, eds., Sternberg Press, 2016, 11-20p.

10ㅤIsabelle Graw, 「Frozen References to Life in Avery Singer's Paintings」, 『The Love of Painting』, Sternberg Press, 2019, 264-266p.

11ㅤ위의 책, 266-269p.

12ㅤ위의 책, 266p.

13ㅤ닉 서르닉, 『플랫폼 자본주의』, 심성보 역, 킹콩북, 2020, 43-82p.

14ㅤMark Titmarsh, 『Expanded Painting: Ontological Aesthetics and the Essence of Colour』, 「The Presence of Paint」, Bloomsbury Publishing(UK), 2019, 2-5p.

15ㅤ위의 책, 6-9p.

16ㅤ김얼터, “전시를 여는 글”, 2021년 6월 28일 접속. 가서 보기.

17ㅤ김얼터, 편집 중 기록된 구글 문서 메모로부터 발췌. 2021년 7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