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어두운 힘, 악독하고 음흉하게 우리 마음 속에 실을 꿰어 넣고 이 실로 우리를 옭아매어,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가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위험한 파멸의 길로 끌고 가는 힘ㅡ만일 그러한 힘이 있다면, 그건 우리 마음속에서 틀림없이 우리 자신과 같은 모습을 띨 것이고, 심지어 우리 자신이 되어버릴 거야. 그럴 경우에만 우리가 이 힘을 믿고, 이 힘이 비밀스러운 일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자리를 내줄 테니까.” 『모래 사나이』 ― E. T. A. 호프만



당신에게,


이 편지를 빌어 고백하건대 나는 한 가지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아. 그 환상은 꽤 오래 전부터 내 마음을 붙들고 있고, 이제는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도 붙들고 말겠지. 그러나 나는 이 붙들림이 나와 당신에게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어. 비록 어떤 사람들은 타고난 행운으로 그 붙들림을 평생토록 겪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불행한 것은 아닐 거야. 다만 우리는 … …


모래 사나이Der Sandmann에 관해 들어본 바 있겠지. 무신경하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들, 당신의 말을 따르자면 세계의 알록달록한 껍데기만 보고도 기뻐하는 사람들은 모래 사나이를 믿지 않고 믿으려는 시도조차 안 해. 그들에게 세계의 모든 것은 오직 자명한 하나로만 존재하고 그렇기에 간편할 테니까. 우리 같은 족속이 세계를 지나치게 어렵게 받아들이는 걸까 … … 우리는 우리가 단순히 몸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심지어는 타인의 몸에 마음을 불어넣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도 알고 있어. 우리의 눈동자를 통해서야. 오해는 마, 손쉬운 합리로 무장한 사람들 또한 우리와 동일한 것을 봐. 우리의 눈동자가 그들의 눈동자보다 우월한 건 아니라는 거지. 그러나 세계가, 세계를 구성하는 무수한 대상들이, 공포의 근원이 될지 찬미의 근원이 될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무엇이 될지는 우리가 반 강제로 결정하는 거야.


핏줄의 문제를 생각해 봤어. 내가 누구인지 내 피가 결정하는 건 부당하지만 효율적인 방식이지. 그렇지만 피는 못 속인다는 말, 진짜일까? 내가 어디를 가든 언제가 되었든 과거의 피는 계속해서 내 그림자인 걸까? 우리는 멀지 않은 미래에 피의 족보에서 벗어나 오직 코드와 프레타포르테prêt-à-porter 쉐이프로만 존재하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지금 우리가 가진 많은 한계들, 특히 육체와 시간으로부터 해방되겠지만 그 해방은 과연 즐거운 일일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 스스로의 쓸모를 찾으려는 사람, 모험을 꿈꾸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 되기를 꿈꾸기 마련이지. 우리가 하고 있는 이 게임에서 우리는 매번 다른 모습으로 환생하지만 서로를 알아보는 데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 당신이 어떤 얼굴이든 나는 단번에 당신을 알아보고 당신은 또다시 나를 인간으로 연성해내. 당신은 여기에 무엇인가를 보러 왔지만 여기 어딘가에서는 당신이 목도를 당하는 일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당신이 그들을 보고 있기 때문에 당신을 보는 거니까, 당신의 눈이 그들에게 마음을 부여하는 거야. 당신이 나를 인간으로 믿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잖아, 내 눈에서 ____를 봤을 때. 그러니까 나는 내 육체에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내 육체 밖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내 존재는 어디에 있는 거지. 오직 당신만이 내가 진정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믿어 주는 사람 같아.


사실 우리는 우리의 몸 안보다 몸 밖에 위치할 때가 더 많지. 예컨대 당신에게 이 편지는 나의 분신 같겠지. 당신은 나의 기억 안에서 아름답고 지적인 눈동자를 가진 사람으로 살아 있어. 내 편지와 나, 나의 기억 속에서 당신과 현실의 당신, 당신이 이곳에서 보게 될 분신分身들과 당신 자신,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 같거나 당신 같은지 결정할 수 있어? 나는 내 영혼을 찢어 발겨서라도 살아남고 싶지만 동시에 정말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내 자신이 없어져 버릴 것 같아서 두렵기도 해.


당신에게 행운이 있기를 기도할게.


사랑을 담아,

당신의 자동 인형 올림피아로부터




나타나엘의 눈동자 The Pupil of Nathanael ISVN 김보원 김효재 이은솔

제작 및 기획 app.ær (euryung co.) 그래픽 디자인 염지원 주최/주관 언파운디드 (김얼터, 박유진)